최만린 미술관
서울 성북구 솔샘로7길 23
서울 평창동의 굽이진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붉은 벽돌이 인상적인 최만린 미술관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곳은 한국 추상조각의 초석을 다진 1세대 조각가 최만린(1935–2020)의 생전 작업실이자 주거 공간으로, 2020년 성북구에 의해 미술관으로 새롭게 조성되었습니다. 공간 자체에 작가의 시간이 켜켜이 배어 있는 이 미술관은, 단순한 회고를 넘어 그가 평생 조각으로 탐구해온 존재와 자연,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사유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최만린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산업화의 과정을 겪으며 인간 실존에 대한 질문을 조각이라는 매체로 풀어냈습니다. 그는 청동, 화강석, 황동 같은 단단한 재료를 다루면서도 곡선과 여백, 무게와 균형이 살아 있는 형태를 구축하며 조형 언어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조각에 대한 개념이 흐릿하던 당시 한국에서 미술교육과 한국적인 조각의 기반을 닦으며 급진적이고 헌신적인 삶을 보냈습니다.


미술관은 작가의 일상에 대해 공간적으로 되새깁니다. 아치형 대문을 지나 실내로 들어서면, 동일한 구조가 전시 공간 곳곳에 반복되어 자연스럽게 관람의 흐름을 유도합니다.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넓은 목조 계단과 건물의 골조, 나무로 마감된 천장 등 최만린이 생전에 사용하던 주택의 구조를 그대로 살린 전시 공간은, 작품과 함께 작가의 삶의 흔적과 동선을 따라가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미술관 내부에는 최만린 작가의 작업 전반을 아우르며, 생애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온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초기작인 <이브>연작은 약탈과 전쟁의 시대를 지나며 삶과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작가가 비정형적인 인체를 통해 인간의 본질과 생명에 대해 탐구한 작품군으로, 이후 조형 언어의 진화를 이해하는 단초가 됩니다. 그의 작품 외에도 조각 작업을 기반으로 한 여러 작가들의 독창적이고 탐구적인 전시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전시실 한켠에는 최만린의 조각뿐 아니라 드로잉, 작업 스케치, 인터뷰 영상 등이 함께 구성되어 있어 작가의 작업 세계를 입체적으로 체감할 수 있습니다.



외부 정원에서는 붉은 벽돌로 쌓은 건물의 외벽과 푸른 잎사귀들이 대비를 이루며 독특한 시각적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나무 그림자 아래 고요히 흐르는 중앙 연못과 그 주변에 자연스럽게 배치된 조각들은, 작가의 시선과 의도를 따라가며 조용히 몰입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합니다. 그 사이사이에 설치된 맥(脈), 태(胎), O 연작은 1970년대 이후 작가의 세계관이 확장되며, 형태보다 본질에 집중하고 인간을 품는 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탐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한 흐름을 보여줍니다. <이브>를 관람한 뒤 야외 정원으로 나오면 이러한 변화가 더욱 대비적으로 다가오며, 작가의 초기 작업과 후기 작업 사이에 존재하는 태도의 극명한 차이를 시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최만린 작가의 삶과 매우 닮은 공간입니다. 곡선과 직선, 자연물과 인공물, 날카로움과 부드러움이 함께 공존하는 구조 속에서 작가가 평생에 걸쳐 구축한 조형 언어가 공간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공간 한켠에 그가 생전 사용했던 끌과 정이 전시되어 있는 것처럼 작가의 삶 자체가 하나의 작품으로 기록되어 천천히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